2011년 6월 23일에 개봉한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이하 소꿈)’이 올해로 개봉 1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역사 속에서 유독 아름다운 미술로 빛나는 ‘소꿈’... 하지만, 이 작품을 아는 이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소꿈’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에 서툴렀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 하지만 그 옷은 분명 ‘명품’이기에 다시금 조명받을 날을 기다리며 여유 있는 미소를 띤 무관의 주인공, 그 작품 속 에피소드들이 궁금했다.
80년대 이전의 우리나라를 담담하게 그려낸 소꿈,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의 고민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주인공들의 헛발질과 도전 그리고 일상을 필름 감성으로 써 내려간 한편의 문학 소설 같은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이 작품의 창조자와 조우했다.
온통 레트로한 물건들로 수놓인 명동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
그곳에선 한창 차기작인 ‘무녀도’와 ‘살아오름’의 후반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사방이 ‘레트로’한 물건들로 가득 꾸며져 있는 멋진 공간이 이곳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했다. ‘레트로 마니아’라면 꼭 봐야 하는 이 시대 최고의 레트로 애니메이션 ‘소꿈’의 안재훈 감독과의 시간을 공유해 본다.
매체의 특성상 가장 먼저 궁금한 건, 감독 ‘안재훈’에게 ‘Retro’는 어떤 의미인가이다.
‘감독’의 입장으로서 나에게 ‘레트로’는 “비어있는 우리의 시간을 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미키마우스’ ‘아톰’ ‘같은 좋은 애니메이션들이 그 나라의 역사와 함께 나타났고 그 나라의 어른들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그들만의 애니메이션과 함께 성장해 왔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전후 시대의 가난 때문에 ‘경제’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왔기에 우리 문화는 우리와 함께 성장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추억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으로서 내 작품에선 그렇게 구멍 뚫린 우리 애니메이션계의 과거를 메우고자 하는 의도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70~80년대 우리네 이야기와, 우리의 옛날 소설을 각색하여 그 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감독으로서 나의 ‘레트로’를 실현해 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거나 동경하는 마음, 또는 내 추억의 일부를 꺼내서 펼쳐 보이려는 일반적인 의미의 ‘레트로’적 의도는 사실 별로 없다.
예상과 달라서 조금 놀랍다. 그렇다면 ‘사명감’으로 과거를 그려 넣는 것인가?
자기 직업에 ‘사명감’을 논하는 사람치고 사기꾼이 아닌 사람이 없다.(‘뜨끔’...순간 찔렸다.) 애니메이션은 공동 작업이다. 내 ‘사명감’에 우리 스탭들이 끌려 다니는 건 옳지 않다. 이들은 단지 자신이 행복한 작업을 하는 것이고 나는 그들에게 동의를 얻어 우리의 과거를 그려나간 것뿐이다.
나에게 '레트로'란....'결핍의 보상'이다.
그럼 ‘감독’이라는 직업적인 부분을 넘어서 개인적으로 본인에게 ‘레트로’는 어떤 의미인가?
개인적으로는 ‘결핍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스튜디오에서 LP를 들으면 사람들은 내가 원래 LP를 즐겨 듣는 사람일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 귀에 LP의 따뜻한 소리를 들려준 적이 별로 없다. 이 좋은 소리를 들려주지 못한 미안함에 나에게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내게 해 주지 못했던 것들을 해 주는 것이 나의 ‘레트로’다.
유행을 좆아 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다. ‘안재훈’ 감독도 자신만의 확실한 향(香)을 가진 사람이다. 꽃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기는 그에게서는 옛날 냄새가 진하게 났지만, 권위적인 강한 느낌은 없었다.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 때문인지 경직감은 이내 해제되었고, ‘감독’이라는 계급장 너머의 좀 더 진솔하고 디테일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 '소꿈'이 여러가지가 궁금했다.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에선 70년대와 80년대가 공존한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판타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사 영화에선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소중한 날의 꿈’ 속 ‘판타지’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품 속에서 ‘판타지’로 표현되었고 그중에서는 시대적인 부분도 있었다.
나는 ‘컬러T.V’가 나오기 전의 시대인 70년대에 주목했다. 컬러T.V 이전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전국 방방곡곡을 ‘흑백’으로 바라보았다. 그 흑백의 기억을 컬러로 채색하여 관객들에게 그 시대를 작은 의미의 ‘판타지’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흔적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감독인 나의 ‘고증’에 대한‘집착’이 작품의 감성에 방해된다는 스탭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추억’이 주는 감성을 좀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데에
때로는 ‘고증’이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미술’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깨알 같은 디테일의 소품들과 배경 작화를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전체적으로 ‘미술’ 작업에 어떤 공을 들였는지 알고 싶다.
주제넘을지는 몰라도 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외국인 포함) ‘한국에 대한 인상(印象)’을 남기고 싶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 아래 있지 않는 우리만의 것을 녹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국내에서 크게 성공했던 ‘너의 이름은’의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와 오래전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애니메이션 세계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과거와 풍경을 우리만의 판타지로 표현하고 싶다.”
“나는 행운아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두호, 이현세 선생님이 만드신 우리만의 독특한 만화 문법을 배웠고. 김소월, 윤동주의 시가 주는 아름다운 감성을 사랑하며 자랐다. 그리고 이제 그런 것들을 양분 삼아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싶다.” 라고 했었던...
나는 남의 것을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를 꾸미고 싶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표현함에 있어서 독자적이고 싶었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 정말 많은 고민과 노력을 더 했다. 일례로 작품의 배경 작업을 위해 예전 우리 ‘방화’를 정말 많이 봤다. ‘영상 자료원’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수십 년 전 ‘방화’들을 보고 또 봤다. 그렇게 그 색 바랜 필름 속에서 독특한 색감, 앵글, 배경의 힌트를 얻어내어 ‘소중한 날의 꿈’에 투영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에 노출되어 자라온 우리 세대는 이미 그들이 만들어 놓은 ‘미학적 기준’으로 작품을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하는 작업은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들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오지 않았던 애니메이션에서의 ‘미술’ 작업에 공을 들인 것은 어쩌면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휼륭한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많이 배출되어 나올 것이라 믿는다. 남들을 따라 하지 않는 독창적인 작법을 가진 가능성의 존재들이 ‘소중한 날의 꿈’을 발판 삼아 더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주기 바라며 ....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발판이 튼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의 ‘미술 작업’이 그들에게 이제껏 본 적 없는 교과서가 되길 바란다.
‘소품과’ ‘미술’을 이야기하다 보니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레코드숍’에서의 ‘카세트테이프’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몇 번이나 돌려봤다. 화면에 나열된 음반에 관한 개인적인 에피소드라도 있을 것 같다.
언뜻 보면 당시에 꽤 인기 있었던 가수들의 음반들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씬에 보이는 몇몇 음반들은 단 한 장만 발표하고 사라진 무명 가수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들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겹쳐지는 ...그들, 무명 가수들의 인생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혹시라도 그 가수 중 한 명이라도 우연히 우리 작품을 보고 자신의 옛 음반을 그 안에서 발견한다면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작업했다.
일본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애니메이션 세계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과거와 풍경을
우리만의 판타지로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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