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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는 누군가에겐 눈물나는 '개벽'이었다.

ㅇㅅㅅㄷ 아저씨

by RetroT 2023. 6.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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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21년 2월 22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기사'입니다. -

여기저기에서 빌려왔어도 전혀 다른 무엇이 되는 마법을, 그때에도 알았더라면....

 

간혹 본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들이 있다. 딱히 재미없다기보다는 이젠 늙어서 기억력보다 치매력이 더 우월인자로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암튼, 반대로 수십 년 전에 봤던 작품인데도 어제 본 것처럼 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경우도 있다. 정확하게는 봉인되어 있던 감동과 설렘 같은 감정들이 풀려나 춤을 추는 것이리라.

스페이스 간담브이

1983년, 그해 여름 방학이었다.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단둘이서 극장에서 봤던 애니메이션 ‘스페이스 간담 브이’는 내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극장에 다녀온 후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 저 위 구름 속에서 금방이라도 ‘간담 브이’가 사선을 그리며 날아와 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멋지게 우리 동네 공터에 내려앉아 그 큰 손을 내밀며 내게 어서 조종석에 탑승하라고 말해줄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언제라도 지구를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엄마 미안해.)

스페이스 간담 브이 포스터, 1983년 7월 21일 개봉

 

그렇게 ‘뽀빠이 과학’에서 출시한 ‘스페이스 간담 브이’ 장난감을 가지고 동네를 휘저으며 뛰어다니던 나는, 어른이 되면 ‘김청기 감독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라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그 순수한 시절의 단꿈은 길게 가지 않았고,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순간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크로스'

일본만화,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어떠한 이유에서 남들보다 일찍 알아버렸던 나 (아마도 운명이었겠지).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진실의 알약을 먹은 것처럼 현실은 고통스러웠다. 언젠가 나를 우주로 데리고 가 줄 간담 브이는 사실 왜놈들이 만든 로봇이었고, 내 이름과 같은 ‘훈이’가 조종하는 대한민국의 수호신 태권브이도 자세히 보니 마징가랑 머리만 빼고 똑같아 보였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을 처절하게, 실존적으로 경험했던 아! 나의 서글펐던 80년대여.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1982년 일본 방송

 

그렇게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SF 메카닉 디자인이나 캐릭터에는 ‘오리지널’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 쪽팔렸다. 그렇게 나는 배신의 십자 상처를 안겨준 우리나라 SF 콘텐츠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 때로는 서글픈 시대를 사는 세대가 짊어져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성장통’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이 나라에 사는 모든 1세대 덕후들에겐, 그렇게 공통의 상처받은 회색빛 서글픈 자존감이 바닥에 안개처럼 깔려있었다.

'격세지감(隔世之感)'

2012년이었다. 따로 인터넷 기록을 찾지 않아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스페이스 간담 브이’가 개봉했던 그해 7월, 그 여름으로부터 정확하게 29년 뒤였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지금에서야 ‘커밍아웃’ 하는 건데, 그 당시 ‘국뽕’이라는 단어도 몰랐던 나는 처음으로 ‘유튜브’라는 걸 보며 혼자 국뽕에 취해 눈물짓곤 했다. 왠지 모를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하이브리드?한 ‘오리지널’이었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내가 울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어쨌든 ‘오리지널’이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에서 만들어졌던 음악 장르에 외국에서 만들어졌던 랩이지만, ‘싸이’라는 인간을 통과하니 그렇게 ‘오리지널’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K’의 역습은 이어졌다. BTS, 블랙핑크, 기생충, K-방역, 킹덤, 스위트홈 그리고 작년에 이어 또다시 미국 영화계를 휩쓰는 ‘미나리’의 대공습까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은 일본에서 작년에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가 ‘사랑의 불시착’이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였다. 일본을 베끼며 비굴하게 살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식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그저 위대한 ‘격세지감’ 그 자체였다.

'승리호

그리고 얼마 전에 드디어 ‘승리호’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또한 공개 2일 만에 전 세계 넷플릭스 영화 차트에서 1위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록을 쓰게 된다. 그렇게 ‘싸이’ 이후 9년 만에 나는 또 울고 말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스페이스 오페라’, 240억 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임에도 할리우드에 전혀 꿀리지 않는 우주 SF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싸이’때 흘린 눈물과는 또 다른 짠맛이 났다. 그렇게 난 주위에 있는 많은 엑스세대 덕후들에게 전화로 카톡으로 떠들어댔다. ......

 

‘개벽(開闢)’이 일어났다 ....라고말이다....

 

영화 '승리호' 캡쳐-넷플릭스

 

개벽

 

‘스페이스 간담 브이’로부터 38년, ‘로보트 태권브이’로부터 45년....참 많은 시간 동안 움츠려 있었다. 현재 이런 퀄리티의 ‘스페이스’오페라‘ 장르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이 지구 위에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간혹 “상상도 못 해봤다.”라는 문장을 사용하곤 한다. 한국 가수가 ‘빌보드’에 오르는 것,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짱을 먹는다는 것, 아니 상이라도 받는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위한 ‘문장’이었다.

 

정말로 나는 아니 우리는 상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미제와 일제가 세계 최고이던 시절이었고, 외국 가수가 한국에서 공연하는 일도 드문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절을 지나, 나는 그 모든 것보다 더 가슴 벅찬 순간을 요즘 ‘승리호’를 보며 느끼고 있다. 실로 ‘개벽’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우리나라에서 ‘스타워즈’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리가....설마....그런데 만들었다. Oh My God! 심형래의 D-War 때와는 전혀 수준이 다르다. ‘승리호’는 정말 재미있고 그럴싸하고 무엇보다도 외국에서도 먹히는 퀄리티라는 것이 아직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영화 '개벽' 전단지, 1991년

 

나는 이 영화에서 수없이 많은 다른 영화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아니 그 누구라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좀 본 사람들이라면 딱 집어 뭐라 할 순 없어도 여러 장면들에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라도 ‘승리호’에 대해 ‘표절’이라는 딱지를 붙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나는 묘한 의문점과 감정 속에서 38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본다. ‘스페이스 간담 브이’의 시대로 말이다. 또한, 45년 전으로 더 멀리...가본다. ‘로보트 태권브이’의 시대로 ..... 그때 만약에 조금만 앞을 내다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모방’을 ‘창조’를 위한 ‘참고서’ 정도로만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애써 만든 스토리가 '로봇 디자인' 표절 하나로 싸그리 저주 받을 수 있다는 걸 미리 인지했더라면.... 그때 단추가 잘 끼워졌다면....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想念)들 속에서 결국 지난 시절은 ‘추억’이라는 상자에 곱게 담기로 했다. 좀 아픈 추억의 상자가 되겠지만...

 

'조성희'

지금 세대들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만의 ‘오리지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것이 세상에서 먹히고 그 중심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대들은 나이가 들어서 그것들을 좀 더 화려한 색깔로 추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참말로 부럽더라. 그렇다고 내가 살았던 시절의 추억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에겐 여전히 태권브이가 주었던 행복의 순간들이 소중하다. ‘스페이스 간담 브이’ 장난감을 샀던 날, 아이들에게 자랑하며 동네를 누비던 그 순간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반쪽짜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괜찮다. 원래 그 시절 어른은 쫌 아파도 괜찮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가끔  벌어진 상처의 통증은 ‘승리호’같은 작품들로 치유 받고, 또 위로받을 수 있게 되는 시대 속에 살게 되었지 않은가! 사실 이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짜릿한 경험이다. 그래서 더욱 ‘승리호’는 나에게 ‘보상’과도 같은 영화다.

 

‘조성희’ 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모방’을 넘어 ‘창조’로 가는 자신감 넘치는 한 끗 차이를 보여주어서...., 상처가 아물 수 있는 ‘개벽’의 시대를 열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조성희 감독, 출처: 크리허브 홈페이지

 

 


리고 지나온 시절들을 그저 앞뒤 가리지 않고 욕하는 이에게도 전하고 싶다.

'태권브이', '우뢰매' 그리고 'D-Wa'r. .... 이 냄새나는 더러운 거름 밭,

그 안에서 ‘승리호’가 태어났다고 말이다.

 

 

 

 

- 이글은 2021년 2월 22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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