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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츠’를 사랑하는 이유

ㅇㅅㅅㄷ 아저씨

by RetroT 2023. 6. 1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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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21년 5월 27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사설입니다. -

 

애니메이션 '검풍전기 베르세르크' 캡쳐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마니아들의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에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한 ‘만화’가 있다.

때로는 6개월, 때로는 1년을 넘게 기다려야 한 권을 만날 수 있는.... ‘베르세르크’는 그런 ‘만화책’이었다. 그렇게 서점에서 산 ‘베르세르크’ 신간은 한 장, 또 한 장 천천히 읽어 내려가야만 했다. 동네 만화방에서처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읽어버리면 기다린 시간의 애달픔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지니까.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음악은 LP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거쳐 C.D로 갔다가 MP3로 넘어갔고 이제는 스트리밍이라는 ‘무소유’ 개념으로 소비하는 시대에까지 다다랐는데, 만화가 ‘미우라 켄타로’는 여전히 흰 종이 위에 연필과 지우개, 펜과 잉크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했는데 그는 늘 작업실 책상에서 세상이 변하는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혼자만의 ‘초 특수 상대성이론’을 캔버스 속에서 증명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남들과는 다른 시간 속에 살다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로 초대받아 사라져버렸다.

 

불멸의 용병
90년대 해적판 만화책 '불멸의 용병' 표지

 

처음 ‘베르세르크’와 마주했던 건 막 대학생이 되었던 90년대 초, 중반 무렵이었다. 그때 이 만화의 제목은 ‘불멸의 용병’이었고 당연히 불법 해적판이었다. 그때는 “그냥 적당히 재미있는 만화네”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정식 발매된 ‘베르세르크’를 본 나는 너무 놀랐었다. “아니! 이게 그때 그 불멸의 용병이라고!?” ...

검사 ‘가츠’와 매의 단 단장 ‘그리피스’가 주역이 되어 펼치는 중세 무협? 활극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특히 ‘황금시대’ 편이라 불리는 초중반 부분의 이야기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 읽게 되는 중독성까지 탑재했다.

그렇게 ‘다크 판타지 만화’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던 ‘베르세르크’는 몇 년 전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 스크린에도 걸렸는데, 나는 설레는 맘으로 첫날 극장에서 관람했었다. 흑백 책 속, ‘가츠’의 처절한 핏빛 여정이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하고 컬러풀하게 스크린 위에 펼쳐졌고, 그렇게 또 다른 ‘명작’ 애니메이션의 탄생에 전율을 느꼈다.

이렇듯,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모두 챙겨보며, 특히 주인공 ‘가츠’에게 남달리 커다란 애정을 품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이야기가 재미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 왜일까?

가츠는 외로운 검객이었다.
무협 드라마 '외로운 검객 군무수(배우: 유덕개 劉德凱)'

 

사실 많은 이들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인데, 가츠는 예전 중국 ‘무협’ 영화/드라마의 서사를 많이 차용했다. 하지만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과 ‘중세’ 세계관이 더해져 전혀 새로운 이야기인 ‘베르세르크’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외로운 검객’이라는 중국 무협 시리즈물이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군무수’라는 검객이 ‘대의’를 위한 고독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내용이었는데, 이 주인공 ‘군무수’는 닌자처럼(가츠처럼) 등에 검을 메고 다니며 절대적인 무공으로 적들을 제압해 나갔다. 외로운 여정 속 ‘가츠’를 볼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 봤던 ‘군무수’가 떠오르곤 했다.

외팔이 검객 시리즈 중 '독비도왕(1969)' 포스터

 

‘가츠’는 ‘그리피스’로 인해 펼쳐진 피의 살육장에서 한쪽 손과 눈을 잃게 된 후 더 강한 전사로 거듭나며 복수의 화신이 된다. 이 또한 오래된 무협 서사에서 차용한 것이다. 60~70년대에 홍콩의 ‘쇼브라더스’가 주도한 무협 영화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명작으로 ‘장철’ 감독의 ‘외팔이 시리즈’는 나를 포함하여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복수’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 ‘외팔이’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 이 시리즈와 앞에서 언급한 ‘외로운 검객 군무수’를 합치고 그 인물을 중세 판타지 시대에 데려다 놓으면 ‘베르세르크’의 '가츠' 모양새가 만들어진다.

그렇다. ‘가츠’를 좋아했던 이유는 80년대 초반 모든 것이 황홀했던 유년 시절의 내가 너무나도 재미있게 봤던 그 무협 드라마/영화 속 ‘검객’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가츠는 핑계대지 않는다.
'베르세르크' 만화책 중 '가츠'의 대사

 

내가 ‘베르세르크’라는 만화에서 ‘가츠’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이다. ‘베르세르크’의 팬 중 상당수가 ‘그리피스’의 서사에도 ‘감정이입’을 한다. 비록 그가 진(眞) 악당이고 최종 보스이지만, 그의 처절한 삶과 간절한 꿈에 대한 이야기에 독자들은 홀라당 넘어가 버린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매력의 악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기의 악역인 ‘그리피스’ 보다 단순 무식한 ‘가츠’가 내 마음을 더 흔드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핑계’ 대지 않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지...)

만화 ‘베르세르크’에서 가장 극적으로 콘트라스트가 강한 장면은 바로 ‘그리피스’가 자살하기 위해 강가에 앉아 있다가 ‘베헤리트’를 발견하면서부터 펼쳐진다. 이전까지의 ‘그리피스’와 ‘가츠’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주인공답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으로부터 둘의 캐릭터는 ‘선’과‘악’으로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악’과 ‘악’에 복수는 자 ... 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베르세르크' 극장판 애니메이션 시리즈 '강림'중 캡쳐, '그리피스'가 베헤리트를 다시 얻게 되는 장면

 

자, 그런데 만약 그 강가에 ‘그리피스’가 아닌 ‘가츠’가 그 지경으로 앉아있다면 어떨까? 몸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지고 혀는 뽑혀서 말을 할 수도 없는 ‘가츠’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며 행동했을까? 그는 아마도 ‘베헤리트’의 요행 따위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많이 말랐잖아.” 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 고기를 달라고 해서 먹고 힘을 내서 다시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몇 년이 걸리더라도 ‘삶’을 살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을 것이다.

 

 “나는 만신창이 걸레가 되었기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죽는다.” -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서사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지만, 너무나 간절한 꿈이어서... 너희를 바쳐서라도 내 꿈을 이룬다.” - 이것이 ‘그리피스’의 서사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즐겨라.

그는 절대로 ‘핑계’대지 않는다. ‘가츠’는 ‘낙인’이 찍힌 채 구천을 떠도는 마물들과 매일 밤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군대에서 매일 듣던 말이 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즐겨라.” 가끔 이 말이 떠오를 때면 ‘가츠’가 마물들과 매일 밤 싸우는 이미지가 그려지곤 한다. 그는 ‘운명’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불운한 상황에 내몰려도 자신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들에 ‘핑계’대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한 채로 검을 뽑아 든다. 그 앞에 있는 적이 아무리 거대하고 강할지라도 한쪽 눈과 한쪽 팔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고 버틴다.

'베르세르크' 만화책 중 '가츠'의 대사

살아가면서 힘이 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 미친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울함의 강가에 앉아 목숨을 저울질 하는가. 모두가 ‘베헤리트’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매주 토요일이 되면 복권방 주변을 서성이며 자신의 운명을 바치는 수 없이 많은 ‘그리피스’들을 보게 된다.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다. 한쪽 팔과 한쪽 눈으로 매일 밤, 잠도 자지 못하고 검 한 자루를 들고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검은검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몇 달 전 4년간 운영하던 ‘가게’를 접으면서 가게 책장에 꽂혀있는 ‘베르세르크’를 오랜만에 꺼내 봤다. 의기소침해서 “뭐 먹고 사나” “어디로 가나” “어떻게 사냐”로 고민하던 시기였다. 책장을 넘기니 ‘가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민하고 걱정할 시간에 글이나 한자라도 더 써라.”

 

‘핑계’대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쉽지 않은 인생길이지만, 시궁창 같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싶었다. 가끔 손바닥으로 한쪽 눈을 가려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깨닫게 된다. 가리지 않은 한쪽 눈이 더 바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베르세르크-가츠' 일러스트-미우라 켄타로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릴것이다." - 우리의 정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그 앞에서 울지 말고, 어서 다른 문을 찾아 떠나야 한다." - '가츠'의 정서

 

평소보다 더 늦게 일어난 오늘도 “고민할 시간에 글이나 한자라도 더 쓰라”는 검은 검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날아간 ‘불멸의 그림 용병’은 그곳에서도 ‘검은 검사’의 이야기를 마감하고 있을 것이다.


 ‘죽음’을 핑계로 펜을 놓을 그가 아니니까.

 

'미우라 켄타로'의 부고

 

 

 

R.I.P 미우라 켄타로 1966-2021

 

 

 

- 이글은 2021년 5월 27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사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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