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2021년 8월 3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기사'입니다. -
흑백으로 기억되는 '70년대'와는 시작부터 결을 달리한 경제 대 부흥 시기의 컬러풀했던 ‘80년대’, 그리고 더욱 발전된 ‘대중문화’와 더불어 ‘서브 컬쳐, 덕후 문화’의 모양까지 잡혀갔던 ‘90년대’는 화려하게 빛났다.
‘1997년’ 그해 겨울 , ‘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나기 전까지는...
‘외환위기’와 함께 가장 먼저 찾아온 ‘문화충격’은 헐리우드의 대작 ‘타이타닉(97.11 국내 개봉)’이었다. 모든 면에서 ‘사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기준을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이 재난영화는 당시 외환위기를 만나 좌초된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묘하게 겹쳐졌다.
‘90년대’의 문을 열면서 사상 최대 관객 동원을 자랑했던 ‘사랑과 영혼(90)’의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록을 타이타닉’은 아주 가뿐히 넘어섰다. 최초로 서울 관객 200만을 넘겼으며, 전국 관객은 무려 500만 가까이 동원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전작인 ‘터미네이터2’의 2배에 달하는 ‘2억 달러’라는 제작비로 모험을 시도한 ‘제임스 카메론’은 이 작품으로 영화계의 ‘신’ 된다.
세기말을 연 첫 번째 ‘슈퍼스타’의 탄생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여인들은 침몰하는 ‘20세기’호의 마지막 여행을 그와 함께했다. 그렇게 타이타닉의 광풍이 몰아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8년 가을, 이전 세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영화가 관객들 앞에 나타난다.
이 단 한 편의 영화로 인해 이후 세상의 모든 전쟁 영화는 이 작품이 새겨 놓은 길을 따라가게 된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흔들리는 카메라 속의 리얼한 전투 장면은 관객들을 총알이 빗발치는 2차 대전의 전투 현장에 서 있는 섬찟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이전 영화들과 다른 완성도를 보여주었는지는 그 바로 2년 전에 개봉한, 걸프전 소재의 영화 ‘커리지 언더 파이어(96)’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최소 10년은 더 전에 만든 영화처럼 어색하고 촌스러운 전투 장면에 실소가 나올 정도다. 같은 90년대에 제작된 헐리우드 전쟁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2004년에 만들어진 우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부터 많은 영감과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후 전 세계 모든 ‘전쟁 영화’는 극한의 리얼한 전투 묘사에 혈안이 된다.
그렇게 ‘세기말’ 헐리우드는 ‘타이타닉’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2개의 작품으로 영화계를 이전의 ‘90년대’와는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다.
한편 ‘타이타닉’으로 ‘제임스 카메론’은 명실공히 새 시대의 영화계 지존이 되었으며 ‘조지 루카스’와 함께 20세기를 풍미했던 흥행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는 반대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정점을 찍고 바통을 ‘제임스 카메론’에게 넘겨주며 매년 조금씩 왕좌와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20세기 끝자락의 ‘헐리우드’는 놀라움과 쓸쓸함을 안겨주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했다.
수십 년 앞을 내다본 신의 한 수
1998년 2월,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와 ‘세기말 공포 정서’ 속에서 방황하는 ‘대중문화’를 위해 ‘신의 한 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 전까지 ‘왜색문화’라며 터부시되었던 ‘일본 문화’를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우리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국내 문화 인프라와 시장이 순식간에 망하게 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자주 이슈화되곤 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덕후’들은 설레는 맘으로 마지막 쇄국정책의 빗장이 풀릴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지혜로운 지도자 한 명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현업에 종사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천명의 그것보다 훨씬 탁월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심어주게 된다. 우리 대중문화는 처음에는 고전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좋은 면을 흡수하여 우리만의 것으로 만드는 ‘자생력’을 키움으로써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오겡끼데쓰까!~
1998년 10월 ‘제1차 일본대중문화개방’과 함께 들어온 영화는 ‘우나기’ ‘하나비’, 그리고 대작 ‘카케무샤’같은 무시무시한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반응은 썰렁했고 일본문화 개방 결사반대를 외치던 이들은 뻘쭘해졌다.
1999년 9월 ‘밀레니엄’을 눈앞에 두고 ‘제2차 일본대중문화개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니아들 사이에서 소문만 무성했던 영화 ‘러브레터’가 드디어 국내에 상륙한다. 그렇게 모두가 걱정했던 ‘일본문화’의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감미로운 OST와 아름다운 일본의 겨울 풍경 그리고 감성적인 스토리는 우리 관객의 취향을 저격했다. 이후 ‘이와이 슌지’가 리드하는 일본의 ‘감성 로맨스’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그 때문에 우리 영화 산업이 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 영화와 우리 대중문화는 더더욱 탄력을 받아 발전하기만 했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수십 년간 국내에서 항상 일정 부분의 ‘지분’을 유지해오던 ‘홍콩영화계’는 ‘홍콩의 중국 반환’이라는 매머드급 변화의 회오리로 인해 좀 더 일찍 ‘세기말’을 맞이했다.
성룡의 ‘코믹 쿵푸’, 오우삼의 ‘쌍권총 느와르’ 그리고 하늘을 나르고 땅을 가르는 서극의 ‘신무협’에 지친 한국 관객이 선택한 감독은 바로 ‘왕가위’였다. 1995년 국내 개봉한 ‘중경삼림’으로 시작된 그의 인기는 ‘타락천사’, ‘동사서독’, ‘춘광사설’로 이어졌고 ‘화양연화’로 꽃을 피운다. 극장 개봉 성적이 탁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니아와 영화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신앙’에 가까운 ‘왕가위 팬덤’은 깊고 고르게 서서히 퍼졌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개봉 최우선순위 영화로 ‘왕가위’의 작품들이 손꼽히는 것은 바로 ‘세기말’에만 유용했던 센티하고 우울한 그만이 정서가 깊게 우리 가슴에 훅을 날렸기 때문일 것이다.
‘소복’ 보다 무서운 ‘교복’
‘처녀귀신’ 보다 더 한 맺힌 ‘왕따’
1998년 일본에서는 ‘링’의 개봉으로 ‘J 호러’의 시대가 개막되고 아시아의 장르 영화계를 리드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색다른 공포 영화 ‘여고괴담’이 개봉한다. ‘학교’를 조금만 변주하면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교복 공포 영화’ 시대를 개척한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 개봉한 ‘조용한 가족’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코믹 잔혹극’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마니아들에게 어필하며, 우리만의 ‘장르 영화 문법’은 그렇게 세기말 정서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 헐리우드 공포 영화와는 다른 우리만의 정서가 듬뿍 담겨있는 ‘공감형 공포 영화’들의 득세는 이후 2000년대 초중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세기말 장르 영화의 득세와 함께 한국 영화의 세대교체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장군의 아들’, ‘서편제’를 통해 한국 영화의 무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임권택’의 시대는 어느새 저물고 ‘초록 물고기(97)’, ‘박하사탕(99)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창동‘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8월의 크리스마스(98)‘, ’미술관 옆 동물원(98)‘, ’내 마음의 풍금(98)‘같은 일본과는 다른 한국형 멜로/로맨스가 크게 사랑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편지(97)‘, 약속(98)’으로 이어지는 ‘최루성 신파 멜로’의 시대도 세기말을 풍미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랑 이야기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1997년 작 ‘접속’이었다. ‘PC통신’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을 통해 ‘한석규’의 시대 또한 활짝 열렸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관객에게 사랑받는 한국형 로맨스 영화가 불붙기 시작했는데, 심지어는 이 작품의 세련미는 우리보다 앞선다고 봤던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세기말 정서를 품은 ‘태양은 없다(98)’, ‘바이준(98)’, 세기말(99)’ 같은 작품들도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 모든 세기말 영화들의 충격은 바로 이 작품의 충격 앞에 가뿐히 무릎 꿇게 된다. 1999년 2월, 세기말의 우리나라 영화계, 아니 문화계 전체를 뒤흔드는 혁명적 사건이 일어난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쉬리’가 개봉한 것이다. 가히 ‘영화계’의 ‘난 알아요’의 등장이었다.
타이타닉을 침몰 시킨 690만 관객 동원의 신화
쉬리
‘쉬리’는 1990년 ‘장군의 아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 영화도 할 수 있다!" 는 가능성의 길 위에, 10년 만에 찍힌 ‘화룡점정’이었다. 본격적인 최초의 완성형 ‘블록버스터’ 영화였던 ‘쉬리’는 우리 영화사상 최초로 서울 관객 200만 명 이상 동원에 성공한 영화였다. 심지어 총 관객에서는 그 무시무시했던 ‘타이타닉’을 이긴 영화로 ‘흥행의 새 역사’를 썼고, 이를 기점으로 일본영화계와의 위상도 뒤바뀌게 되어 말 그대로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한다.
시대가 바뀌어서 ‘작품’이 나오는 것인지 ‘작품’이 나와서 시대를 새로 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세기말’ 극장가/영화계는 ‘타이타닉’, 그리고 ‘쉬리’라는 혁명적 영화로 ‘밀레니엄’의 달콤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 이글은 2021년 8월 3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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