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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로 인해 행복했던 2시간의 '90년대' 여행: '건축학개론'만의 '레트로 승부수'

기획

by RetroT 2023. 6. 14.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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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21년 5월 5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기사'입니다. -

 

‘레트로 추억 영화’에 홀리다. #2

 

#1에서 이야기했던 영화 ‘써니(2011)’가 대중들에게 80년대의 추억을 강력하고 컬러풀하게 자극했다면, 1년 뒤에 나온 영화 ‘건축학개론(2012)’은 ‘90년대’를 감성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하여 ‘엑스세대’들의 추억 회로에 잔잔한 레트로 감성을 불붙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레트로 추억 영화’에 홀리다 두 번째 순서는 ‘써니’와는 다른 결의 레트로 영화 ‘건축학개론’ 예찬이다.

 

색 다른 레트로 추억 영화 :
건축학 개론


옛 추억을 연상케 하는 매개물로 인해 뭉게뭉게 주인공이 과거로 디졸브 되며 펼쳐지는 레트로 영화를, 필자는 ‘레트로 추억물’이라고 칭한다. ‘써니’에선 그 매개체가 여고생들의 교복과 학교 정문 그리고 앨범 속 사진들이었고, ‘건축학개론’에서는 15년 만에 만난 옛사랑과의 과거 진실 공방전이었다. 그렇게 ‘건축학개론’은 두 주인공을 1996년도의 대학생 시절로 날려 보낸다.

주인공 '서연'과 '승민'이 15년 전 이야기를 하며 회상씬으로 바뀌기 직전 장면

독특한 점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대중들의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 것은 맞지만, 영화 자체가 ‘레트로’라는 것에 그다지 집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90년대 중반의 초짜 대학생들의 첫사랑 이야기지만, ‘90년대’라는 시대상의 ‘고증’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직 ‘첫사랑’의 태동과 아픔과 흘러간 시간 뒤 주인공들의 감정에만 집중한다.

 

레트로 마니아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런데도 이 영화가 ‘레트로 추억물’의 레전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사랑’이라는 ‘소재’ 자체가 ‘과거 지향적’이라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배우 ‘이제훈’과 ‘수지’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모두에게 ‘과거’를 추억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첫사랑’을 아련하게 잘 다듬어 놓은 것이 이 영화의 ‘레트로 승부수’였다.

 

영화에서 ‘서연(수지)’은 누가 봐도 엑스세대 여대생의 패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오히려 ‘80년대’ 시골 처녀의 비주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90년대의 자유분방한 에너지와 댄서블한 분위기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잔잔하다. 언급했듯이 굳이 90년대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와 삐삐 그리고 CDP 속에서 흐르는 전람회의 노래 정도로 짧고 굵게 ‘레트로 감성’을 우아하게 전달한다.

극중 '서연(수진)'의 대학생 시절

때로는‘고증’이 빛을 발하는 영화가 있다. 예를 들면, 영화 ‘1987’이 그러하다. 시대의 아픔을 명배우들이 합심하여 만든 묵직한 수작이기도 하지만, ‘레트로 영화’로서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하는 만드는, 한 장면 한 장면마다 80년대가 진하게 묻어있는 ‘고증’이 잘 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영화 ‘1987’처럼 하드한 ‘레트로 영화’가 전혀 아니다. 이 작품은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봐야 좋을 ‘레트로 영화’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영화 '1987' 포스터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납뜩이(조정석)’가 승민(이제훈)을 만나 ‘무스’ 사용법을 알려 주는 장면이 있다. 사실 96학번으로 등장하는 ‘이제훈’이 무스를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미 당시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들도 무스, 젤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분의 연기를 ‘납뜩이’가 기가 막히게 소화해 내서 사람들은  “아! 그래 나도 학창 시절에 무스 많이 썼었는데 ...” 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넘어가게 만든다.

 

극중 '납뜩이(조정석)'가 무스 바르는 장면

‘서연(수지)’의 시골 언니 패션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다분히 ‘남성들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남성향’ 영화이다. 그렇기에 ‘수지’가 로데오 거리의 배꼽티를 입은 엑스세대 언니로 등장하기보다는 스테레오 타입이더라도 긴 머리, 치마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은 예스러운 비주얼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수지의 비주얼이 남성들의 보편적인 ‘첫사랑 감성’을 건드린 것이고, ‘첫사랑’이 가지고 있는 ‘과거 지향성’ 때문에 영화를 본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레트로 지수’도 자연스레 올라간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이렇듯 ‘레트로 영화’에서도 ‘고증’ 보다 중요한 것이 ‘기획’이고 ‘연출’이고 ‘배우’라는 것을 확인 시켜 준다.

 

또한, 이 영화에는 엇박자? 레트로 씬들이 많이 들어있는데 그 중 인상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1.에서 언급한 영화 ‘써니’ 보다 오히려 훨씬 더 구식이라고 느껴지는데, 바로 이 장면은 ‘정릉 ’주변의 한옥’에서 펼쳐진다.

 

영화 초반에 두 주인공이 주인 없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한옥에 들어가 60~70년대에 만들어진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고 마루에 앉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의 배경인 90년대 이미지와는 매치가 전혀 안 되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분명히 관객들에게는 따뜻한 ‘레트로한 감성’을 전달하지만, 딱히 어느 시대인지의 구분은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도 두 배우의 풋풋한 연기가 없었더라면 아마 소재 낭비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극중 '서연(수지)'와 '승민(이제훈)'이 한옥에 있는 장면

또한 주인공 ‘승민(이제훈)’이 사는 집에는 옛날 자개 장식장과 도자기들이 있다. 정확한 시대의 이미지는 흐려지지만 예스러움은 남는다. 이렇듯 영화의 몇몇 레트로 씬들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지만, 두 주인공이 나란히 건물 옥상에서 Sony CDP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듣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아 90년대 중반이구나”를 강하게 각인하게 된다. 이리저리 과거를 수십 년씩 분주하게 넘나들다가도 정신 차리라고 한방씩 훅을 날려준다. 그렇게 이 영화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90년대’ 레트로 영화의 레전드로 남게 된다. 영화는 계속해서 ‘전람회’ CD를 보여주고 ‘게스’ 티셔츠를 보여주고 삐삐를 보여준다. 그 정도면 되는 것이다.

극중 등장하는 소니 '디스크맨' CDP

그렇다. 이런 ‘레트로 영화’도 있는 거다. ‘레트로 마니아’ 입장에서는 태클을 걸고 싶어지지만, 영화의 만듦새가 너무 좋고 감독의 지향점이 분명하기에 수긍하고 따라가다 보면 이내 마음에 여운이 감돌며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면 나도 모르게 ‘멜론’에서 ‘기억의 습작’과 함께 그 시절의 음악들 ‘O15B’와 ‘이오공감’ ‘푸른하늘’을 찾아서 듣게 되는 것이다.

극중 등장하는 '전람회' 1집 C.D

이 영화에서는 ‘응답하라 1988’이나 ‘맘마미아’처럼 그 시절의 아이코닉한 음악들이 주야장천 나오지는 않는다. 오직 하나 ‘기억의 습작’으로만 승부한다. 꽤 영리한 연출이었다. 햄버거 가게에서 짜장면을 팔면 망하는 것처럼, 2시간짜리 장편 영화에서 ‘첫사랑’ 이 한 가지만 아련하게 남으면 성공하리라는 걸 처음부터 노리고 집중한 것이다.

 

굳이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조정석’이라는 ‘캐릭터’가 보너스로 따라온 것 정도일까
(보너스라고 하기에 존재감이 너무 크지만....)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씬,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소포 속 CDP와 ‘전람회’가 주는 깊은 여운은 진정 레트로 화룡점정이었다. 이 장면 하나로 우리는 이 영화를 ‘90년대의 첫사랑의 이미지’로 각인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

영화 ‘건축학개론’은 90년대를 사랑하는 ‘레트로 마니아’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작품이다. 그리고 ‘첫사랑’에 설렜던 기억을 가진 모든 남자를 한방에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필자에게는 ‘조정석’의 ‘스네이크 키스론’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기억의 습작(1994)-전람회-

이젠 버틸 순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봐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건축학개론 '팬 메이드 포스터'

 

 

건축학개론
개봉: 2012년 3월 22일
각본, 감독: 이용주
출연: 과거(이제훈, 수지)
          현재(엄태운, 한가인)
          고준희, 조정석, 유연석, 김동주 외
상영시간 : 118분
관람객 수 : 4,112,233명

 

 

 

- 이글은 2021년 5월 5일에 작성된 '레트로 타임즈'의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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